6. 상처받은 사람도 예배드릴 수 있을까
6. 상처받은 사람도 예배드릴 수 있을까
교회 문을 열기까지 30분을 망설였다. 지난주 리더십 모임에서 내 의견이 완전히 무시된 후, 다시 그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거잖아,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면 안 되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주차장에서 엔진을 끄고 한참을 더 앉아있었다.
찬양이 시작되었을 때, 몸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손을 들고 찬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가사가 입에서 맴돌기만 할 뿐 진심으로 부를 수 없었다. "주님만이 나의 전부입니다"라는 가사가 나올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그런데 왜 주님의 사람들이 내게 상처를 주나요?"라는 질문이 맴돌았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는 일반적인 상처와 달랐다. 일터나 학교에서의 갈등은 그저 사람 사이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교회에서의 상처는 나의 신앙 자체를 흔들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서 받은 상처는 마치 하나님께서도 나를 거부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다윗의 기쁨으로 춤추게 하소서"라는 찬양을 부르면서도, 내 마음속에는 다윗의 시편 중 가장 어두운 구절들이 울려 퍼졌다. "내 영혼이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편 6:3). 상처받은 마음으로 어떻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깨어진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마태복음 12:20)
예수님을 묘사하는 이 구절은 우리의 약함과 상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할 때만 받아들이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상한 갈대'처럼 부러지고 약해진 우리를 더욱 부드럽게 대하신다.
시편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정직한 예배를 보여주는 놀라운 예다. 다윗과 여러 시편 기자들은 그들의 분노, 두려움, 의심,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질문까지도 숨김없이 표현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1)라는 절규부터 "주의 성전에서 내가 그를 바라보리이까"(시편 27:4)라는 갈망까지, 시편은 인간 감정의 전 스펙트럼을 담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시편 22:1을 인용하셨다는 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 하나님의 아들조차 극심한 고통 속에서 버림받은 느낌을 표현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상처와 질문이 신앙의 여정에서 자연스러운 부분임을 보여준다.
히브리서 4:15은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라고 말한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상처를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아픔을 친히 경험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찬식 때의 분열(고린도전서 11:17-22), 은사를 둘러싼 갈등(고린도전서 12-14장), 그리고 여러 인간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갈등 중에도 함께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이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했다.
그렇다면 상처 속에서도 예배할 수 있는 것일까? 성경은 분명히 "예"라고 답한다. 실제로, 가장 정직하고 깊은 예배는 종종 우리가 가장 약하고 상처받았을 때 일어난다. 예배는 우리의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이것이 바로 상처받은 사람의 예배다. 환경과 감정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변치 않는 본질에 집중하는 예배.
교회에서의 상처는 특별히 아프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상처를 넘어,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상처받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종종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예배가 된다는 점이다.
시편 기자처럼, 나는 이제 내 상처와 질문을 하나님께 숨기지 않는다. "하나님, 오늘 예배당에 들어가기 두려워요. 당신의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마음으로 어떻게 당신을 찬양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정직한 고백이 의외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됨을 발견했다.
상처 속에서 예배드리기 위한 몇 가지 진실을 배웠다:
첫째, 교회와 하나님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완벽하지 않다. 교회에서 받은 상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가 상처받을 때 가장 가까이 계신다(시편 34:18).
둘째, 예배는 감정의 표현만이 아니라 진리의 선포다. 내 감정이 따라오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때로는 "나는 지금 느끼지 못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선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신앙의 행위가 된다.
셋째, 예배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춤추고 손을 들며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때로는 침묵의 눈물이, 때로는 정직한, 심지어 분노 섞인 질문이 예배가 될 수 있다. 욥의 질문들, 예레미야의 애가, 다윗의 탄식도 모두 예배의 일부였다.
넷째, 나 혼자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주변에도 상처를 안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약함을 통해 위로받고, 함께 치유되어 간다.
어느 주일, 찬양 중에 갑자기 눈물이 왔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아픔의 눈물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상처받은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하나님, 저는 지금 정말 아파요. 그런데 그 아픔 가운데서도 당신을 찾고 싶어요."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상처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 상처 때문에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심을 느꼈다.
이제 나는 안다. 상처받은 사람도 예배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상처가 오히려 더 깊고 진실한 예배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한 마음이 아니라 정직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임을.
"부서진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 나의 제사니 하나님이여 이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 한 줄 묵상
상처받은 마음으로 드리는 정직한 예배가
때로는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예배가 된다.
- 기도문
하나님,
때로는 예배당에 들어가기조차 힘든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믿음의 공동체에서 받은 상처는
다른 어떤 상처보다 깊게 저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분임을 기억합니다.
당신께서는 제 모든 눈물을 보시고, 모든 아픔을 아십니다.
저의 정직한 질문과 탄식조차도 예배로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깨어진 그대로의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이것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상처를 통해 더 깊은 예배자로 저를 빚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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